▲ 보물 제96호 미륵석불입상은 자비를 보여주는 양 엷은 미소를 띠며 북쪽을 향해 서 있다. 특이한
    것은 얼굴에만 때가 
묻지 않아 마치 화장을 한 듯한 모습이다. 충주시청 제공

 
 
1000여 년 전, 월악산 자락에 서서 복잡한 눈빛으로 북녘 하늘을 바라보던 남매가 있었다.  천년사직을 제 손으로 내려놓는 아비의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비통함에 괴로워하던 오라버니는 마의를 걸치며 격변하는 세상과 작별했다. 누이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향하던 남매는 생멸의 숙명에 메인 사바세계의 무상함에 번민하다 중원 땅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춘다.

탁 트인 북녘아래 고운 선을 그리는 봉우리 너머로 남매는 서방정토의 환상을 봤던 것일까?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안녕과 영원을 염원했던 오라버니의 마지막 의지는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폐사지 중심에 우뚝 선 석불로 남아 미륵세계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누이는 건너편 마애불로 남아 그러한 오라버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6m 높이의 석축과 그 안에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를 쌓아 만든 10m 높이의 불상, 폐사지 중심에 솟아오른 5층 석탑과 길이 6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귀부. 폐사지로 짐작되는 창건 당시 미륵사의 규모는 일견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의 절망과 멀어 보인다. 정황상 고려 초기 중원 지역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창건됐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으나 이 또한 폐사지로 고즈넉한 현재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폐사지는 마치 처음부터 폐사지로 완성된 듯 외진 산세와 더불어 조화롭다. 이제 폐사지는 역사적 추론보다 남매와 얽힌 전설로서 자연스러운 공간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속 사리봉안기에 새겨진 좌평 사택적덕의 딸, 무왕의 비(妃)보다 서동과 가슴 떨리는 로맨스를 나눈 삼국유사 속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가 더 아련하듯.

지금의 한적한 모습과는 달리 고려 때까지만 해도 미륵사지 주변은 늘 사람들로 시끌거렸다. 특히 조선 시대 문경새재의 개통 전까지 문경과 충주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각광받았던 '하늘재'는 우리 사서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옛 고갯길로 유명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늘재'는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왕의 영토 확장 정책에 따라 개척됐다. 태생적으로 인간의 정복욕의 결과물인 이 옛 고갯길은 삼국시대 내내 끊이지 않는 분쟁으로 위태로웠다. 현세의 고통에 신음하던 민초들의 마지막 의지처는 보이지 않는 내세에 대한 맹목적인 낙관뿐이었으리라. 어쩌면 미륵사지는 내세의 부처 '미륵'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절망의 흔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