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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륜으로 다져진 리더가 천하를 다스린다

multiki 2011. 2. 26. 11:44

연륜으로 다져진 리더가 천하를 다스린다
기사입력: 11-01-17 18:29   조회5968      별점:
신동기 (신동기 인문경영연구소 대표)
[인문으로 배우는 경영] 역사 속 나이 어린 리더 VS. 연륜 갖춘 리더


지금껏 갈고 닦아 놓은 1인자의 자리, 누구에게 물려줘야 후회하지 않을까? 수많은 리더의 고민일 것이다. 후계자를 세울 때 고려해야 할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경험’의 중요성은 재차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겪어본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상황 대처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연 리더에게 연륜은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편집자주)


순조•헌종•철종, 왕위 계승이 그 어린 나이만 아니었어도…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안타깝게 생각되는 시기가 바로 조선왕조 23•24•25대 왕인 순조•헌종•철종이 다스린 63년(1800-1863년)간이다. 300년 이상 지난 조선왕조의 피로현상을 극복하고 겨우 다시 중흥기를 마련한 영•정조의 76년(1724-1800년) 치적을 모두 무위로 돌린 것이 이 세명의 왕이 통치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왕실과 혼인을 맺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세도정치를 펴면서 전정•군정•환곡의 3정을 문란케 하고 매관매직, 과거 부정으로 국가 시스템 자체를 혼란에 빠트렸던 시기가 바로 이 63 년간이었다. 그러기에 1863년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마자 제일 먼저 나섰던 것이 세도정치 세력을 몰아내고 삼정의 문란을 올바르게 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밀물처럼 밀려드는 외세의 간섭과 며느리인 왕후 민비와의 갈등으로 깊어질 대로 깊어진 조선의 환부는 수술까지 가지도 못하고 결국 외세의 추악한 탐욕 앞에서 그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왕조는 갔지만 이 땅의 백성은 남았다. 조선 왕조의 지도층이 저질러 놓은 잘못에 대한 대가는 그대로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36년간의 일제 강점이었다. 그렇다면 순조•헌종•철종 3왕 시대 제대로 된 정치가 실종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조선시대는 모두 27명의 왕이 518년간 다스렸다.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이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를 때 평균 나이는  24세였다. 조선 왕들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헌종이었다. 7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순조였다. 보위에 오를 때 나이가 10살이었다. 그리고 헌종의 뒤를 이은 철종은 헌종이 22살에 죽는 바람에 자손이 없어 부득이 집안 먼 친척으로 강화에서 농사를 짓다 갑자기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학문은 고사하고 글도 읽을지 모르는 19세의 농촌 청년 ‘강화 도령’ 철종이었다. 중국에서는 아편전쟁(1840-1842년)이 터지고, 일본에서는 선각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죠슈(長州)에 쇼오카 손쥬쿠(松下村塾)를 차리고 피를 토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요동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의 위기를 외칠 때, 조선왕조는 어린 왕을 에워싸고 기득권 세력들이 국가 시스템을 유린하고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데 정신이 없었다.

역사에 가정은 무용한 일이지만 순조•헌종•철종 3대가 조선 27명 왕의 평균 왕위 계승 연령인 24살에만 보위에 올랐더라도 조선왕조는 그렇게까지 이웃 국가들의 탐욕 희생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척의 세도에 그 정도로 놀아나지 않았을 것이고 앞서 76년간 영•정조의 치적을 이어받아 그대로 개혁 분위기를 지속시키기만 했어도 그렇게 손쉽게 일본의 먹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마 공화정 시대 집정관은 40세 이상으로 제한
공화정 시기(BC509-BC27년) 때 로마는 집정관의 피선거권 자격에 대한 연령 제한을 두었다. 40세 이상이었다. 그 때는 수명도 지금보다 훨씬 더 낮았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로마 시민들 생각에 40은 넘어야 국가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결과였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대통령이 되려면 선거일 현재 40세에 달해야 한다(67조 4항)고 정하고 있다. 로마에서 집정관이 되기 위한 자격에 연령 제한을 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로마의 영토 확장은 BC27년 제정 시대로 들어갈 무렵 대체로 마무리되나, 로마 제국 최대 판도를 자랑하는 시기는 13대 황제인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때이다. 로마 최대 전성기인 5현제 시대는 이 트라야누스 황제를 포함한 다섯명의 황제가 차례대로 제위에 오른 96년부터 180년까지이다. 5현제 시대, 팍스 로마나 시대를 가져 온 다섯명의 황제는 12대 네르바(96-98년), 13대 트라야누스(98-117년), 14대 하드리아누스(117-138년), 15대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년), 16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년)이다. 이들 황제들의 공통점을 보면 어느 정도 학문이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 나이가 40이 넘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폭군의 대명사로 생모를 살해하고 동성과 결혼을 했던 5대 황제 네로(재위 54-68년)가 16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영화 글래디에이터로 더욱 유명해진 로마 제정 최악의 황제 17대 콤모두스(재위 177-192년)가 16살에 제위에 오른 것을 보면, 한 국가나 한 조직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르는 사람의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폭정을 일삼았던 황제 콤모두스는 헤라클레스를 자처하다 폭군 황제답게 애첩과 시종장, 친위대장 등 가장 가까운 세 사람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다

유방이 항우를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연륜
한왕조 4백년을 건국한 유방(BC247-BC195년)의 항우(BC232-BC201년)에 대한 승리 원인도 나이로 설명될 수 있다. 개인의 능력으로 보나 당시 인물 영향력 평가의 중요한 요소인 집안으로 보나 유방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또 진나라가 망하고 진승과 오광의 반란에 편승해 난을 일으킬 때에도 유방의 세는 항우의 세와 비교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 싸움에 있어서도 유방이 승리한 경우는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항우는 연전연승으로 항우의 사전에 패배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륙의 패권은 항우가 아닌 유방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 유방의 근본적인 승인은 결국 나이였다. 유방과 항우의 나이 차이는 14살이었다. 당연히 유방이 더 많다. 유방은 항우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진왕조를 무너트린 뒤 항우왕의 싸움에서도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뎠다. 그러나 7년간 70회의 싸움에서 단 한번도 패배를 하지 않았던 항우는 그의 최후 싸움이자 최초의 패배전이었던 오강포 전투를 하늘이 그를 버린 것으로 생각해 포기하고 말았다.

‘흙먼지를 날리며 다시 돌아온다’는 고사성어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낳은 오강포 전투지만 정작 그 주인공인 항우는 권토중래를 하지 않았다. 유방의 공격을 피해 오강을 건너 후일 강동의 건아들을 모아 그야말로 권토중래, 재기를 도모해야 했었지만 항우는 그러지 못했다. 불세출의 영웅, 24살에 몸을 일으켜 대륙의 전장을 종횡무진하면서 7년동안 70회 싸움에서 불멸의 전과를 세운 31살의 항우는 젊은 패기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단 한번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 우미인의 목을 치고 26기의 군사들과 함께 최후의 결전으로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후세에 극적인 감동은 남겼지만 역사를 일으키는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만일 14살이 더 많은 45살의 유방이 항우의 입장이었다면 유방은 당연지사 권토중래를 도모했을 것이다. 물론 이 때도 최후의 승리는 유방이 쥐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륜이 주는 지혜 때문에.

천하의 전략가 제갈공명이 유비를 섬긴 이유는?
AD 220년 무렵 한왕조가 망한 뒤 시작된 위•촉•오 삼국 쟁패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유비는 항우와 비교되는 경우이다. 나라를 세우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입지였지만 나이, 연륜으로 당당히 천하삼분의 한 축을 잡았다. 한 왕조의 후예라고 하지만 한 왕조가 시작된 지 벌써 400년이 지난 뒤라 유비는 사실 최소 수만명 내지는 수십만명 유방의 후손들 중 한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정통성이라면 정통성이겠지만 진정 유비로 하여금 천하삼분을 하게 해 준 핵심 요인은 황실의 후예라는 신분이 아닌 당대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받은 제갈공명을 고문으로 스카웃한 일이다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다보면 어떻게 보면 진정한 주인공은 유비나 조조가 아닌 제갈공명이다. 삼국지 중간에 등장하긴 하지만 그가 한 역할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성과 또한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고용된 고문이었을뿐 오너는 유비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오너의 명성을 능가할 정도의 성과를 내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당연히 그는 제거의 대상이었다. 오너가 보상해 줄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 성과를 내는 것은 오너를 능멸하는 일일 뿐 더 이상 충성일 수 없기 때문이다. 유방에 대한 한신이 그런 입장이었고, 사울에 대한 다윗의 입장이 그랬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역사적 인물보다 오너를 뛰어넘는 성과를 내고 명성을 떨친 제갈공명이 유비로부터 견제당하지 않고 장수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유비와 제갈공명의 나이차였다.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공명을 찾아가 머리를 숙일 때 유비의 나이는 47살이었다. 당시로 치면 손자 엉덩이 두드리면서 뒷방차지를 할 나이였다. 그리고 제갈공명은 새파란 27살이었다. 47살의 황실 후예가 학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검증된 바 없는 27살의 젊은이를 고문으로 영입하기 위해 세 번이나 그의 집을 찾아갔다.

결국 핵심은 나이였다. 세상 살만큼 살아보고 실의와 어려운 과정도 겪어 본 유비의 입장에서 20살이나 손 아래인 제갈공명의 성과나 명성을 질시할 일은 없었다. 자신은 오너로서 지분만 꽉 쥐고 잃지 않으면 되었다. 명성은 허허로운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손에 쥘 수 있고 눈앞에 보이는 실재였다. 실리주의자이자 연륜의 지혜를 갖춘 유비 입장에서 제갈공명이 큰 성과를 내면 낼수록,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주군인 자신은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나이였다. 공허한 명성에 집착하려는 인간의 약점을 충분히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40대 후반이었다.

리더로서 연륜의 중요성
280년 지속된 당왕조의 초석을 닦은 당태종은 정관정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까운 과거에 반란을 다스린 군주들을 보니 모두 40세가 넘는 나이였고 후한의 광무제만 33세였다. 단지 짐이 18세에 군대를 일으켰고, 24세에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여 29세에 천자가 되었으니 이는 짐의 무덕이 옛 군주들을 앞선 것이다. 젊어서는 전쟁 때문에 독서할 여가가 없었으나 정관 이래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보아 풍속과 교화의 근본을 알았다’ 자신의 탁월함과 리더로서의 연륜의 중요성을 함께 말하고 있다. 물론 본인도 젊어서 큰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보니 세상 알만하겠다는 자기 고백도 함께 하고 있다.

혹자는 오늘날 기업의 오너 회장이 마치 과거 왕조시대 제왕같다고 말한다. 당대 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고 소유지분에 의해 자리를 세습한다는 점에 있어서 왕조시대의 왕과 지금의 기업체 회장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왕조시대 후계자를 정하는 것처럼 오늘날 기업체의 후계자 승계 역시 연륜이 매우 중요하다.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 변화와 도전이 전통과 정통을 앞지르는 21세기 경영 환경에서 한 리더의 사고와 행동이 조직과 사회에 미치는 결과의 편차가 과거보다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조직의 성장뿐만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도 후계자의 연륜은 냉정하고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것이 재화와 조직 그리고 사회가 함께 잘 되는 길이다.

신동기는…
신동기는 ‘신동기 인문경영 연구소’ 대표로 현재 석세스TV, 지식라이브러리, 한국경제신문 Hi CEO 등에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거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기업체를 비롯해 정부기관 및 금용기관 등에서 ‘인문학과 경영’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해피노믹스>, <희망, 인문학에게 묻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