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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는 어느 집안 조상인가?
경주김씨 태자파 마의태자 1세로 삼은 새 족보 제작에 부안김씨, 통천김씨 등 “마의태자는 우리 조상” 반발
정장열 차장(jrchung@chosun.com)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912?~?). 망국의 한을 품고 삼베옷을 입은 채 산천을 떠돈 것으로 알려진 이 비운의 태자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문중들이 각기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같은 논란은 경주김씨 태자파(太子派) 대종회(회장 김주경)가 작년에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1세로 삼은 대동보(大同譜·동성동본에 딸린 모든 파를 합쳐서 엮은 족보)를 만들어 문중에 배포하면서 증폭됐다. 경주김씨 태자파는 당초 경주김씨 대장군공파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 순웅(順雄·932~1015년) 대장군을 중시조로 삼고 있던 문중으로, 순웅 장군의 윗대를 마의태자의 배다른 동생인 은열공으로 계대(繼代·대를 이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열공의 나이가 순웅 장군 보다 오히려 3~4살 어린 점 등을 이상하게 여겨 지난 2000년부터 진짜 뿌리찾기에 나선 결과 순웅 장군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대동보 제작에 나섰다. 2009년 9월에는 대종회 명칭도 대장군공파에서 태자파로 바꿨다. 정사(正史) 기록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어머니는 경순왕의 첫째부인 죽방부인 박씨고, 은열공은 고려에 손국(遜國·나라를 넘김)을 결정한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경주김씨 태자파가 마의태자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근거로 삼은 문건은 크게 두 가지. 조선시대 인물인 경주김씨 세신공(1668~1736년)이 쓴 ‘월성가승원대세계(月城家乘遠代世系)’와 1934년 발행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로, 월성가승원대세계에는 ‘순웅과 경순왕 사이에 세계(世系)의 기록을 잃었다’ ‘그러나 (순웅과 경순왕 사이의) 연대가 매우 가깝다’는 등의 문구가 나오며, 삼성연원보에는 김일(金鎰·마의태자의 이름)의 두 아들이 선웅(善雄)과 순웅으로 분명히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 족보에 근거한 경주김씨 태자파의 주장에 대해 여타 김씨 문중들은 반발하고 있다. 부안(부령) 김씨 대종회(회장 김창원) 측은 “마의태자의 두 아들은 선웅, 순웅이 아닌 기로(箕輅)와 교(較)로, 두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입산하여 설악산 근처에서 시녀의 손에 의해 양육되다 마의태자가 돌아가신 후 세상에 나왔다”며 “두 형제는 고려의 탄압을 피해 기로공은 부령현(현재의 전북부안)에 정착해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고 교공도 강원도 통천에 자리잡아 그 후손들이 본관을 통천으로 행관했다”고 주장했다. 마의태자가 경주김씨가 아니라 부안김씨, 통천김씨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현재 부안김씨와 통천김씨 측이 이러한 주장을 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주김씨 태자파가 마의태자를 1세로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인 신라삼성연원보가 엉터리 족보, 이른바 위보(偉譜) 잡보(雜譜)라는 것이다. 부안김씨와 통천김씨의 입장을 대변해온 ‘신라김씨연합대종원’ 김진광 부총재는 “1934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김경대라는 사람이 발행한 것으로 돼 있는 신라삼성연원보는 곳곳에 사실(史實)과 다른 기술이 많고 같은 책 안에서도 내용이 모순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족보”라고 주장했다.
김 부총재에 따르면, 신라삼성연원보의 잘못된 기술은 경순왕의 부인과 태자 부분에서부터 나온다. 신라삼성연원보에는 ‘경순왕의 비는 송희부인 석(昔)씨로 5남을 두었는데 태자의 이름은 전(佺)’ ‘태자는 왕이 고려에 항복할 것을 청하자 극렬하게 간했지만 왕이 듣지 않자 통곡하며 자결했다’는 기술이 나오고 이어 ‘계비(繼妃) 죽방부인 박씨는 3남을 두었는데 김해군에 봉해진 장자 이름은 일(鎰)’이라는 기술 등이 이어진다. 이 김일(金鎰)이 왕이 고려에 항복할 것을 청하자 개골산에 들어가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살며 생을 마쳤다고 돼 있다. 우리가 아는 마의태자의 행적이다.
이에 대해 김진광 부총재는 “경순왕 부인 중 죽방부인 박씨와 낙랑공주 외에 석씨가 있다는 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어디에도 없고 신라삼성연원보에만 기재돼 있고 태자 이름이 전(佺)이며 자살했다는 기록도 여기에만 나온다”며 “삼성연원보에 따르면 태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김일이 마의태자라는 다른 기록이 맞는 건지 아닌지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 버린다”고 지적했다.
삼성연원보는 ‘경순왕 14공자(公子) 실기(實記)’라며 경순왕의 아들이 모두 14명인 것 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게 김진광 부총재의 주장이다. “경순왕의 자손들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앞서 기록된 족보는 1624년 조선 중종 때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현 김녕김씨)입니다.
여기에는 죽방부인으로부터 얻은 경순왕의 세 아들 이름은 아예 없고 낙랑공주에게 낳은 은열공 이하 5명의 이름만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조선 정조 8년인 1784년 은열공의 묘지(墓誌)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죽방부인에게 낳은 세 아들의 이름(鎰, 鍠, 鳴鍾)이 밝혀진 것이고, 마의태자 이름이 일(鎰)이라는 것도 이 때 처음 알려졌습니다. 모든 김씨 문중이 인정하는 은열공 묘지(墓誌)에 따르면 경순왕의 아들은 14명이 아닌 8명입니다.”
부안김씨 등이 반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는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 가계와 관련된 기록들이다. 경주김씨 태자파가 새로 만든 대동보에 따르면, 김부식은 마의태자의 두 아들 중 첫째인 선웅의 5세손이 된다. 순웅 대장군을 마의태자의 아들로 계대한 결과 순웅 장군과 형제인 선웅의 자손인 김부식이 자동으로 마의태자의 5세손이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정사(正史)와는 다른 심각한 오류가 빚어진다는 것이 부안김씨 등의 반박이다. 김진광 부총재는 “정사 기록을 보면 김부식은 분명히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돼 있는데 태종무열왕 후손들은 경주김씨가 아닌 강릉김씨로 행관을 하며 태종무열왕의 제사도 지낸다”고 주장했다. 실제 조선 전기 서거정이 펴낸 문집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김부식의 손자 김군수(金君綏)의 시 ‘동도객관(東都客館)’에는 ‘무열왕의 후손 문열공의 집(武烈王孫 文烈家)’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문열공은 바로 김부식을 뜻한다.
김 부총재는 “고려사를 보면 태조 왕건이 936년 경주를 만들어 최초의 주장(州長)으로 위영(魏英)을 삼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위영은 김부식의 증조이며 선웅의 3세손”이라며 “경주김씨 태자파의 주장대로라면 위영은 경순왕의 5세손이 되는데 978년에 죽은 경순왕이 살아있을 때 경순왕의 5세손이 생존해 주장이 됐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그는 “마찬가지로 고려에 계속 반항했던 마의태자의 아들을 고려의 대장군으로 삼았다는 주장도 상식에 반한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반박에 대해 경주김씨 태자파 측은 “마의태자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은 이미 법원의 판단을 거친 사안으로 우리는 법원의 판단이 나온 후 새로운 대동보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회 등은 지난 2005년 10월 마의태자를 1세로 삼은 새로운 대동보 편찬을 준비 중이던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대동보편찬위원회를 상대로 “신라계 김씨 일가의 족보에 대혼란을 야기하게 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대동보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이 소송에는 부안김씨와 통천김씨 대종회도 보조 참가인으로 가담했다.
당시 소송에서 경주김씨 대장군공파는 자신들이 제출한 근거 자료인 ‘삼성연원보’ ‘갑술보’ 등을 위보, 잡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이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소송에 대해 “사건 신청에 대해서는 법률상 권리보호의 이익을 인정할 수 없다”(1심) “김순웅과 마의태자 김일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아니하였지만 김순웅이 김일의 둘째 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할 것”(항고심) 등의 이유로 사건 신청을 기각했고, 대법원도 2007년 8월 항고심의 결정을 확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신라김씨연합대종원 김진광 부총재는 “당시 법원이 역사적 진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셈인데, 그렇더라도 족보는 역사에 근거해 기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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