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유익한 정보/뿌리 역사학습

본관이 부령김씨여야 하는 이유

multiki 2014. 12. 13. 16:31

지포 김구 문정공할아버지 본관은 부령김씨 

지포 김구선생(경지재) 사이트 바로가기 http://cafe.daum.net/jipo-kimkoo

 

본관이란? 그 성씨의 시조 할아버지의 출신지를 가리킨다. 또는 그 가문의 기원지(起源地)를 말한다.

 

부령김씨는 관시조 태자 일(마의태자)의 증손(曾孫)이신 상서공(尙書公)(諱:景修)께서 처음으로 고려 문종(文宗 : 1067-1082)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 우복야(右僕射) 벼슬에 오르시고 그 아들 춘(春)님께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우시니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책봉(冊封)되어 부령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기에 본관을 부령으로 정했다.(부령김씨 유래에서...)

 

본관이란 조상을 바꾸지 않는한 영구불변한 조상의 뿌리역사이며, 정통성의 가치가 명문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시조이신 김알지부터 신라 2000년 역사의 정통성을 타 김씨문중도 인정하는데 부안김씨는 정통성을 말할 수 있는가?

 

근래에 와서 우리 본관(本貫)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이에 대한 정확한 고찰을 통하여 확실한 정의를 내려야 겠기에 그동안 다양한 자료를 섭렵 검토하고 각 가문의 관명을 수집 조언을 통하여 결론을 내리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우리의 본관(本貫)은 부령(扶寧)이 타당하고 다만 남에게 알기 쉽게 편하게 호칭할 때 부안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전 KBS PD 우리 일가 형관씨가 북한 방문시 평양에서 고위급 간부를 만났는데 자기가 부령김씨라고 자랑하면서 북한에 살고 있는 많은 일가들이 부령김씨라고 한다는데 본관을 바꾼다면 북한에 사는 일가들은 어찌할 것인가?

 

작금의 분쟁의 씨가 부안이라고 주장하는 시기가 1979년 가을 대종회 총회에서 결의된 결의문을 가지고, 본관도 바꾼 것처럼 주장하는데 당시에 나도 참석했지만 결의 내용은 시조를 태자 일(마의태자)로 하고, 기로, 희보, 경수로 연면계대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위반한 족보는 위보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다.

 

그 결의문에 부안김씨대종회라고 단체명이 기록된 것을 대종회 명칭도 결의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다면 모순인 것이 이후 1981년 발간된 부안김씨대보라는 족보 표지에는 부안김씨라 쓰고 족보 역사 내용에는 시조를 경수를 1세로 하고, 그 외의 많은 선조들의 본관은 부령인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렇다면 그 대보는 위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당시에 대동보를 발간하기로 하고, 각파 대표들이 토론하였으나 일부 일가(실명은 생략)아무개는 본관은 부안으로 1세를 경수로 주장하여 소윤공파, 소감공파 대표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도 않아 결국은 결렬되어 완전한 대동보가 아닌 군사공파 일부 주장대로 반쪽의 부안김씨대보라는 족보가 출간되었다.

 

결과적으로 대동보를 만들지 못하고 오늘에 와서 그 진실을 모르는 후손들은 전체 의견이 반영된 부안김씨로 알고 당연시하는데 이는 선조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군사공 파 중에 지평공파 자헌공파의 후손들은 가족관계증명원(호적초본)에 부령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군사공도 100% 동조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지켜본 나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으나 각 파들이 앞 다투어 파보를 만들면서 각기 다른 시조와 다른 본관으로 발간하였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와 같은 사태를 타성씨는 호재로 알고 김일(마의태자) 김부대왕을 자기네 시조라고 주장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꼴이다.

 

우리 문중의 최초 족보인 갑신보(1584년 발행)에도 부령김씨라고 서문에 명기되어 있고,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 을사보(1785년 발행)와 시직공파의 병신보(1836년 발행)에도 본관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사직공파 동호공께서 분명히 가름지어 부령으로 칭관함이 옳다고 매듭지어 이후 200여 년간 모든 족보, 파보에 기록하고 칭관하여 왔습니다.

 

이후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1980년대부터 어느 개인의 아집으로 비롯된 것이 마치 문중 전체의 결의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지명 변경에 따른 본관 개칭은 크나큰 오류이고, 조상에 대한 죄악입니다.

 

작금에 부령이다 부안이다는 부끄러운 논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 보다 우리가 책임지고 이 문제를 정리하여 2000년의 정통성을 계승한 왕손의 명문가로 물려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아래에 나의 연구 검토한 내용을 열거합니다. 본 글을 보시고,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홈페이나 글로 제시해 주시면 성심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1.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는 영욕의 역사가 있는바 이를 잊어서는 그 민족과 국가의 미래가 없다고 하였다.

 

2. 따라서 우리 씨족(가문)의 역사 즉 과거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각 집안에는 소중하게 족보가 있고, 그 족보에는 선대의 행적과 가문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족보를 살펴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을사보(乙巳譜 1785년)부터 최근 1980년) 까지의 모든 족보는 부령(扶寧)김씨 세보라고 발간하였으며 모든 족보마다.

 

3. 특히 그 내용 중에 성관향 고찰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거기에 부령, 부안 양론이 있는데 지명을 떠나 선조의 봉군명이 부령부원군이니 부령으로 칭관함이 의당하다고 명백하게 기록하였으며...

 

4. 문정공 구(坵) 선조부터 조선조의 현관 석학 선조들까지 모두 부령(扶寧)김씨라고 기록하고 있는바 우리들의 선조들의 본관(本貫)을 어찌할 것인가?

 

5. 또한 우리 가문에서 출가한 수많은 선대 할머니들의 본관이 부령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타 가문의 족보는 어찌 할 것인가?

 

6. 예를 들면 문정공 선조의 따님이 서원정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현재 서원 정씨 모두가 그 할머니의 자손들이 부령(扶寧)김씨 할머니라고 한다. 또 하나 공주시 유구면에 부령(扶寧)김씨 열녀문은 진주유씨(유근창집) 가문의 자랑으로 추앙 받고 있으며, 충남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열녀문의 명칭을 바꾸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집안과 무관하다고 할 것인가?

 

7. 이상과 같이 검토해 보면 우리 가문의 자랑스런 조상들의 행장, 가장, 묘비명, 묘표문, 신도비문 등의 기록은 어찌할 것이며, 묘지명, 묘비명, 상석, 세천비등 금석문에 새겨진 것은 어찌할 것인가? 예를 들면 시승공파가 연전에 대전지방의 도로개설 공사시 선대의 묘를 이장하면서 묘지석과 천개석에서 부령(扶寧)김씨를 발견하고 자기들의 칭관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8. 지금까지는 우리가문 위주로 살펴보았다면 다른 가문도 살펴보자.

 

가. 본관의 의미는 시조나 현조가 살았던 거주지나 출신지로 모두 피를 나눈 혈족 집단의 일원이며, 문벌 의식을 드러내는 부호나 기호의 역할이라고 정의 했다.

 

나. 한국인이라면 태여 나서부터 자연적으로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우리의 유구한 전통 문화였다. 특히 고려 중기 이후 즉 문종대에서 관종이라하여 성씨와 연관해 문벌의식을 드러내어 구별할 때 본관을 병칭한 것은 본관에 출신지에 적(籍)으로써 의미가 아니라 성과 관련한 하나의 부호 또는 표시로 사용되었다.

 

라. 중국은 거주지를 옮길 경우 본관과 시조까지 바뀐다.

 

마. 예를 들면 조선조 청해 이씨(함남북청), 임란때 귀화한 천만리의 영양천씨,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 태씨, 율곡, 충무공 이순신의 덕수 이씨, 반남 박씨, 기계 유씨, 해평윤씨, 풍산 류씨, 도강 김씨 그 이외에도 수많은 성씨들이 명문가임을 내세워 본관을 바꾸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바. 진(陳)씨 중에 여양(驪陽) 진씨가 여양군(驪陽郡)의 봉군(封君)에서 비롯되었는데 그후 강릉, 나주, 삼척, 신광 등 지명으로 분관 되었다가 원래의 본관인 여양진씨로 통합되었습니다.

 

사, 그에 비해 별 볼일 없던 지역이나 가문들의 본관을 가진 성씨가 이름난 본관으로 갈아타는 것이 유행하던 때도 있었다. 성씨까지 개변한 사례는 희박하지만 동성은 동족이라는 관념으로 본관을 갈아타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본관을 달리하면 혈연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성씨 연구자들의 견해다

 

아. 조선 후기 실학자 반계 유형원도 본관제도를 비판하고, 다산 정양용 가문은 압해 정씨의 지명이 없어진 후에도 명문가로 성장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았으며, 압해라는 곳은 알지도 못하지만 살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덕수 이씨 역시 현재는 없어진 지명이지만 그대로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자. 따라서 다산 정약용이 당시의 세태를 개탄하면서 환부역조(換父易祖)라는 행위를 나무랐다. 즉 특정 가계를 통째로 문벌 있는 가문의 후손으로 깜쪽 같이 둔갑시키는 행위를 말 함이다.

 

차. 본관 제도의 출발은 성씨와 무관하게 시작 되었지만 고려 중기 이후 문벌사회로 치달았으면서 성과 연칭하는 사례가 보편적인 일로 받아 들여져 문벌 의식을 위한 수단이나 부호로 조상의 본관은 생활 터전이 바뀌어도 이적하지 않고 조상의 본관을 연칭하여 지속성을 이어 가고 있다.

 

결론은 이처럼 본관이란 단순한 지명이나 생활 터전의 의미보다 가문의 문벌 의식을 표현하는 즉 현관 석학들의 조상들을 나타내고 자랑하는 일종의 불변의 상징으로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에 근래에 들어서 많은 성씨들이 지명에 따라 바꾸었던 본관을 본래의 본관으로 되돌리는 사례가 김해김씨→ 김령김씨, 청주 정씨→서원 정씨, 대구 서씨→ 달성 서씨, 영일 정씨→ 연일 정씨, 강진최씨→ 탐진최씨 등... 따라서 우리는 자랑스런 조상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각 파의 족보에도 부안김씨 족보에도 족보 내용은 부령이고, 표지만 부안으로 되어 있는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한다.

 

물론 타성씨 중에는 분관(分貫)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관(本貫)을 바꾼 것이 아니라 후손 중에 높은 벼슬이나 학자가 나오면 그분의 군호 또는 세거지를 비롯하여 본관명을 만들어 분리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경순왕의 아들이 9명뿐인데 여기에서 분관된 본관만 280여개입니다. 즉 분관한 것입니다. 특히 경주김씨에서 분관 된 것이 가장 많고 우리 부령김씨에서 분관 된 태안김씨, 부여김씨 그 외에도 황씨 문씨, 태씨, 천씨, 전씨, 고씨 등 많습니다.

 

18세기 이후에 명문가 본래의 본관으로 흡수 통합한 사례가 많습니다. 조선초 세종실록지리지에 4,500여개의 본관이 1980년대 인구조사(호적)시 본관이 3,000여개로 통폐합 되었습니다. 우리도 분관을 하지 않는다면 본래의 본관을 지켜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부안김씨를 본관으로 하자는 주장은 첫째 지명변경과 1970년대 말 이후 족보에 부안으로 표기한 것을 모두 통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문정공 이후 800년 동안 30여대 선조들이 사용한 본관 부령과 불과 30여 년 전에 일부 일가들의 오랜 정통성을 무시하고 사용한 부안 중 어느 쪽이 옳은 것인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본관이란 지명이나 파회장이 결의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명분이 있는 분관(分寬)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 우리성씨와 족보이야기(박홍갑 저)/타성씨 문헌/우리문중의 신 구 족보 40여권

 

부령(부안)김씨 대종회 회장 김창원